번역 : 1998년 5월 25일 박찬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 교회 목사)

    Jesus and Political Authority

    Richard J. Mouw

    from [Perspectives on Christology]

    edited by Marguerite Shuster & Richard A. Muller

     


     

    예수는 정치적 권위와 관련하여 무슨 행동을 하였는가? 만약 예수가 정치적 행동을 하였다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성서의 묘사 속에서 또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정치적 권위의 타당한 사용을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모델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이 에세이에서 내가 앞으로 진술할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여기 이 글에서의 나의 목적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답변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크리스찬 사상가들이 그 문제들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찾아내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낸 이유 중의 몇몇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나는 이러한 난관을 불러일으키는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요소는 정치 이론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것들의 양을 언급하는 연구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와 관련이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예수의 동시대 정치 생활의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을 다룰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장기적인 그리스도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논쟁의 불일치를 다룬다.

    여기서 내가 사용하는 단어인 difficulties는 거의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 당시의 정치적 리더쉽의 양태에 예수의 사역을 함축성 있고 논리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과제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정치적 공정성의 새로운 명시에 대한 필요는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정치적 권위는 우리가 예수 당시의 정치생활에서 운영되던 권위의 행사방식을 탐구하려고 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매우 실제적인 장애에 의해서도 축소되어지지 않는다.

    THEOLOGY AND POLITICAL THEORY

    첫 번째 어려움은 좀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명확하게 적절한 실례가 있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정치 이론에서의 논쟁 거리들 사이의 적절한 연계 문제는 예수 당시 정치적 현상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와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서의 대처 방식의 관계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문제들의 배경 하에 고려되어져야 한다.

    주로 투시나 조망을 통해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성서 신학자들과 사회과학의 맥락에서 정치적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관심사 사이에는 최근까지 이해할 만 하지만 유감스러운 거리(Gap)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일면 수긍이 간다. 그것은 사회과학이 지난 몇 십년동안애 이론 면이나 방법론적인 면에서 급속히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규율과 하위 규율들이 매우 빠르게 출현하였으며 그러한 것들은 개인 연구자나 학자 집단에게조차도 조망(투시)의 감각을 유지시키는 것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또한 많은 기독교인 학자들이 그들의 학문적인 의도를 정치행태, 국제법, 정당의 연구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이 기독교인들은 크리스찬 신학자들과 철학자들로부터 확실한 지도를 받지 않고 그들이 갖고 있는 흥미에만 관심을 두고 연구해 왔기 때문에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틸리히의 용어를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성서의 메시지와 예수 당시의 정치에 대한 연구 간의 차이를 좀히려고 한다면 일종의 상관관계를 확립하는 과제가 필수적이고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상고하는 성서는 자연과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첨삭할 수 있는 사회논리학 또는 정치학 이론의 교과서가 아니다. 진실로 성서는 그 어떤 것의 교과서도 아니다. 성서는 인간 상황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해답인 복음을 필요로 하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긴급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매개체이며 그 메시지의 보고(寶庫)이다. 여기서 정치적 문제들은 생활상의 긴급한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진술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성서의 각 장은 정치적 이미지가 담긴 미래에의 소망과, 정치적 관습과 정책들에 대한 예언자적 비평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통치자에 의해서 혹은 통치자에 대해 쓰여진 시편이나 정치적인 음모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물론 여기서 제기되는 실재적인 행위들은 정치 이론의 주요 주제, 적절한 관련이 있는 주제와 개념과 안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사용한 'POLITICAL THEORY'라는 용어는 사회 정치 현상에 관한 지적 토론의 광범위한 분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이론'의 범위는 '사회 정치철학'이라고 불리는 철학의 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게다가 정치학의 학문적 부분에서의 학자들의 관심 사항과 정치 과학, 정치학 연구의 개념적 기초와 규범적 정치 이론 전례법규(rubrics) 밑에 제기되는 문제를 다루는 정부에 관한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학문적, 지적 토론에 있어서 이러한 분야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이 생긴다. 즉, 정치적 관계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체 왜 우리는 정치 구조를 가져야 하는가? 정치권력의 목적과 한계와 본질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정치적 권위의 양식은 다른 류의 권위 양식과 비교할 때 차이가 나는가? 모든 정치체제는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정치적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가장 최상, 최선의 정치 체제는 무엇인가? 각 정치 체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그 문제들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서 연구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성서가 그런 사상들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올바르게 사고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위의 질문들은 인간의 본질,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권위 양식 같은 실체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논점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성서의 저자들은 이와 유사한 논점을 다루고 있으며 심지어는 반복해서 다루기도 한다. 성서 저자들의 진술 형식의 특징은 긴급성과 신랄함에 있다. 성서가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성서의 메시지와 정치 이론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위한 우리의 시도에 극복 못할 문제를 만들지는 못했다. 결국 정치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정치 현상은 그들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고 통상적으로 주장한다. 동시대 정치행태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정치적 실재의 긴급하고 날카로운 논점을 연구해 온 많은 이들과 집단과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게 연구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더욱 정제된 이론을 공식화하기 위해 경험적 연구를 극복하는 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구체적인 정치적 자료와 조화할 수 있는 모델과 구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데 의무감을 갖는다. 성서와 정치이론이 구체적인 정치적 자료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상관관계를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지하게 중요한 고려점을 제공한다.

    진실로 성경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정치 이론가들은 확장된 자료 연구를 가지고 그들의 연구를 개진한다. 정치적 행동의 적당한 범위를 상상함에 있어서 그들은 당대 생활의 정치적인 발후의 흥정이 이뤄지는 방과 의회와, 민족의 영토를 연구하여 그들이 수집할 수 있는 정치적 정보뿐만 아니라 모세, 드보라, 이세벨, 다니엘 그리고 스데반과 요한의 정치적 행동 양식에 주의할 것이고 당연히 예수의 정치적 행동양식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John Howard Yoder의 1972년 책, 'The Politics of Jesus'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예수 사역의 연관성을 검토하는데서 출발한다. 이 책의 요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예수 (Jesus-without-politics)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곧 많은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챤들은 요더의 이 책이 경건파의 무기력으로부터 그들을 깨어나게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요더의 주장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그 문제, 예수없는 정치(politics-without- Jesus)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방해한다. 요더는 우리가 예수의 정치적 역할을 규범적인 표준으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치의 영역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더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 고안된 설교적 성격을 가진 일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 주장은 정치이론가들이 지향하고 있는 가장 최고의 경험적인 것에 대한 도전이라 문제제기가 된다.

    요더의 주장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는 그가 우리들이 정치에 대한 권위적이고 본보기적인 고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변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중요한 의미에서 예수의 따르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의탁함에 의해 정치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제자의 신분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그것의 순수성 속에서의 정치를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조망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다른 정치활동의 방식들을 이상적 형태의 변형으로서 간주하게 된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경우에 있어 요더 자신의 공식화를 초월한 것임에 틀림없다.

    요더의 주장은 관련있는 이론가들의 종교적인 헌신과는 별도로 그처럼 정치적 이론과 연관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서 그가 그의 책에서 제시한 주장 중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방식으로 확대되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이 예수의 사회적 인간성의 본보기적인 질적 측면이 우리 사회윤리를 위한 하나의 모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방식을 통상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요더가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일반적으로 정치 이론가들의 예수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무관심이, 실제적이고 가능한 정치적 행동의 방식에 관한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일반적으로 이론화되었다는 점에서 정치 이론가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해서 적절하게 정의를 내리는 문제는 요더의 토론에서 모든 요점들이 기껏해야 표면 근처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예수가 우리에게 급진적인 정치활동의 모델을 그의 주장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예수는 정치적 선택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사회정치윤리적 선택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예수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적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의 담지자라고 주장하는데 그 정의의 문제가 있다.

    몇 가지의 요지는 요더 스스로가 이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장황한 각주에서 그는 예수가 'polis'라는 용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요지에서 그는 아래에서와 같이 극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예수는 그에 대한 정의(definition)의 다양성의 혼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는 권력있는 사람들이 이상과 논리적 타당성, 정치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수용되는 정의를 대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예수는 "당신이 당신의 정치를 소유할 수 있고 나는 더욱 중요한 어떤 것을 할 것이다."라로 말하지 않았다....예수는 "국가, 사회,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빗나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치적 이론에 있어서 기초적인 방법논리와 개념적 잇슈의 응용 가능성은 명확하게 되었다. 'Value-free'라는 경험론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엇이 정치의 세계에서 실제적이고 가능한가에 대한 일반화는 실제적 또는 가능한 정치적 행동과는 대비되게 검증되고 실험되어져야 한다. 예수의 정치적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 요더가 하는 주장의 대부분은 정치학상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설정되어 온 이론들과는 대조되는 반증으로 여겨진다.

    예수의 정치적 행동-더욱 특별히 예수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요더의 주장-은 의심을 가진 이론가들이 어떤 의미에서 규범적이라거나 혹은 심지어 두드러진 것으로서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조차도 현존하는 일반화에 대한 반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매우 극소수의 동시대의 이론가들은 히틀러를 훌륭한 정치인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아직껏 그런 극소수들은 어떻게 해서 히틀러의 정치와 정치가들의 기능이 어떤 의미에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론을 감히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예수가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였고 정치활동에 종사하였다면 예수의 경우도 역시 우리에게 실제적인 정치적 신념과 정치적 활동에 대한 일반화와 관련이 있는 자료를 제공했었을 것이다.

    사실상 정치적 이론에 대한 성서 이야기의 관련성을 직접 느껴지는 경험적 자료에서 찾기는 어렵다. 크리스챤 사상가들은 정치적 주제들의 토론 속으로 성서적인 정보를 소개, 도입하기 위하여 총괄적인 역사상의 변명에 종사할 필요는 없다. 정치적 이론이 정치 개념의 명확화와 관련되어 있는 한 완전히 가설적인 예로서도 이 토론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 즉, 예를 들면 플라톤은 Gyges' Ring의 이야기가 사실적 이야기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전형적으로 사회계약론자들은 그같은 현상을 역사적으로 위치해 있는 상황 속에서 'state of nature'와 'veil of ignorance'로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렇지만 각 경우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같은 이런 저런 일들 이 발생한다면 어찌되겠는가?"라는 문제는 정치적 이론의 토론에서 가끔 중요한 요소들이다.

    정치 영역의 근본적인 이해에 대한 예수의 정치적 사역의 개념적인 연관에 관한 요더의 주장은 비신학적인 규율에 대한 명확한 함축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두말할 나위없이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의 사역과 정치생활의 관계에 관해서 요더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요더처럼 이슈에 관한 재세례파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Vernard Eller가 이 주제에 관헤서 매우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엘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크리스챤이 정치의 무대로 진입할 때 그는 그가 모든 다른 시민들과 함께 같은 조건하에서, 같이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의 기독교 신앙은 그를 특별히 이끌지도, 특별한 지혜를 주지도, 특별한 신분적 지위를 주지 않는다. 또한 특별한 특권도 주지 않고, 특별한 이익이나 특별한 상대적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그에게 더욱 많은 정치적 안내를 주지도 않고, 실험실에서 동료 크리스챤에게 현대 물리학의 안내도 주지 못한다.

    반면에 '정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더는 현재 깜짝 놀랄 만큼 보통의 유권자와 직업 정치인, 급진주의자들과 심지어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정치과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의견이 만장일치되는 그러한 '가정'과는 의견을 달리했던 고 Paul Goodman같은 세속적인 사회비평가와 제휴했다. 그 가정은 즉 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으로의 진입의 문제이고 그리고 나서 의사 결정, 지휘, 통제, 강제 그리고 사회의 활동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굳맨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내가 보편적인 동감에 의문을 품었을 때 나는 내가 제대로 된 혹성에 살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속았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옳은 것이고 불가피하다는 듯이 사물에 대해 신경질적인 상태에 있으며 비실용적인 기초를 취하고 있다.

    정치적 관계의 범위에 대한 협소하고 신경질적인 이해는 막스 베버의 '정치적' 집단의 정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베버의 견해상 정치집단은 그것의 질서의 강제가 행정 관료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힘으로서의 위협과 그 힘의 적용이 주어진 지역 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을 말한다. 요더와 굳맨으로부터 온 이러한 견해는 정치질서의 한 면의 본질만을 묘사할 뿐이다. 즉 정치 질서의 사악성과 신경증적인 면만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요더는 정치를 너무 제한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으로 정립된 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요더가 정치권력의 사용에 있어서 그것이 표준적인 것들과 신경증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개선하고 폭넓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예수의 선교적 임무와 권위가 정치적인 분야에서도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기독교 정치 사상가들은 당연하게 언급된 계율 속에서 정치적 사고와 활동의 영역 내에서 가능한 양식 그리고 그 범위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적인 무장을 제공하는 것에 의해 그리고 이런 문제에 관한 개념을 명료화함에 의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비록 예수가 우리에게 정치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라는 것이 확립되었을지라도 북미 같은 정치 환경의 타협 속에서 과연 어떻게 예수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이러한 주제에 관하여 정말 놀랄 정도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최근에 기독교 사회사상가들 쪽에서 이야기되는 삶의 맥락에서의 접근(contextualization)에 대한 토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치 생활에 있어서 현역 정치가와 관련된 전후 관계에는 거의 관심이 주어지지 않았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현대 '미덕의 윤리'의 필요에 대해 최근에 많은 글을 써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껏 정치 관청에서의 미덕의 실천을 다루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진지한 기독교인들의 시도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분명히 기독교인 학자들은 정치 공무원들에게 고려되어야 하는 또는 고려되어져야 했던 본질적인 정책 이슈에 대하여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재료들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 학자들은 정치적 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책무와 지위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주제가 항상 무시되어 왔던 것만은 아니다. 이태리 르네상스 시대 동안에 특별히 플로렌스 시에서 유지되고 취급되어졌다. 피렌체에서의 상세한 토론에서 Quentin Skinner의 정치적 사고의 결과로 Patrizi의 The Kingdom and the Education of the King, Sacchi의 The Prince, Carafa의 The Office of a Good Prince, Pontano의 The Prince, Machiavelli의 The Prince 같은 15, 16세기의 정치적 조언을 담은 책들이 그 주제와 흐름을 잘 언급하고 있다.

    이 중에서 'mirror for princes'라는 작품 속에서 저자는 정치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타당한 미덕의 양식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을 통치자에게 조언하였다. 그 충고 중의 몇몇은 순수하게 정치적 미덕을 발전시키는 것에 관하여 크리스챤에게 조언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정말로 우리는 정치적 조언 서적으로서-해로운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많이 해석되어 온 마키아벨리의 작품 속에서 그의 실제적인 의도를 우리가 이해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실제 의도에서 잘못된 해석조차도 살펴보면 적어도 최근의 윤리적 문학 속에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지도와 안내의 형태를 선호하고 정치권력의 행사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을 알게 된다.

    가치 있는 정치 관청의 행동으로서 주의를 끄는 것은 이미 직업적인 활동이 있는 다른 분야에서 이미 고도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그것이 심지어 의학적 직업에 비해서 와는 과도하게 발전되어졌다고 하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의료 윤리에서의 서적의 출판은 과거 지난 20여년 내에 사실상의 산업이 되었다. 이 서적의 엄청난 비율은 내과의사 쪽에서의 약의 처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떻게 해서 내과의사는 환자와 관련을 맺게 되는가? 내과의사의 의사결정은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 내과의사에 의해 의학적인 중재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전에 있어야 할 타당한 지시는 무엇인가? 가장 최근의 의료 윤리학자들은 그들의 관심의 폭을 넓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현존하는 의료윤리 분야에서의 서적들은 주로 내과의사의 성품이나 가치 또는 의사의 의사 결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적 사고를 통해서 윤리학자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체제와 정책에 주로 초점을 둔다. 개인의 정치적 미덕의 패턴은 최근 크리스챤 사회윤리 학자들에 의해 꽤 많이 무시되어 왔다. 예수의 사역이 개인 정치가들을 위한 적절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정치성이 동시대 정치 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해방신학)조차 자본주의자이며 민주주의에서의 개인 정치가에게도 특별한 소명을 많이 말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정치적 이상이 주로 정치경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 직업 정치가들의 미덕의 추구 같은 문제에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예수의 정치적 이상이 정치경제 구조의 개혁에 있다는 이 가정은 정치적인 덕성을 경시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대규모의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광범위한 태도로 유포되었다. 대부분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유일한 정치적인 덕성의 패턴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회의론자들은 정치는 본질적으로 지저분한 사업이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상세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 우리는 정치 무대로부터는 많은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한 검토는 중요한 것이다. 정치체제는 일종의 Holding Action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정치적 직업들은 같은 견지에서 검토되어진다. 정치가들은 많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선을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에 바라는 가장 최선의 것은 그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만일 공무원들이 적절한 개인적 성품을 갖고 있다면, 예를 들어서 그들이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좋은 가족 관계를 유지한다면 지나치게 심한 부패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생활에 대해서 매우 광범위한 기독교인들의 견해는 그것이 개인적 성품에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출된 정치가들의 미덕은 특별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미덕들은 일상 사회에서 대중들 누구나가 소유하기를 원하는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미덕들은 신실한 보험 대리인 또는 신실한 연출가 또는 좋은 축구 코치를 묘사함에 있어서 거의 같은 미덕들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보통의 크리스삻들은 정치가들이 정치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덕성을 계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무엇이 정치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표현될 수 있는 정치적 덕성인가에 대한 인식의 폭은 작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크리스챤 사회윤리 학자에게 돌아가게 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독실한 사랑에 관하여 토론해 왔다기보다는 신실한 내과의사들에 대한 토론을 주로 하는 조력자들이었다.

    이 문제의 전면에서 양쪽 부분에 대해 진술할 동등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든다면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내과의사의 책임을 다룸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주제를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꽤 타당하다. 예수는 신성을 가진 치료자였다. 우리가 그를 위대한 내과 의사라고 부르는 것도 그럴듯하다. 오늘날의 기독교인 치료자들은 예수의 치료 사역을 통해서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 관청의 행위를 다루는데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주제를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끊임없이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고 시작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해방자로서 당연히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인 윤리학자들과 정치 이론가들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들은 그런 것들을 정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시장(mayor)으로 움직여 가는 것을 혐오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치료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의사로까지 되어 가는 것보다 더 서투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한가지 명확한 이유는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본질 가까이 와 있다) 북미 정치체계에서의 정치 관청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의학과 정치 토론 사이에 조화할 수 있는 점을 찾는다면 우리는 엄격히 말해서 우리가 신성의 내과 의사로부터 인간인 내과 의사로 이동한 바처럼 신성의 통치자로부터 인간인 통치자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난이 올 수 있다. 15세기 플로렌스의 정치조언 서적의 저자들은 아직까지 그런 움직임을 갖고 있다. 이 저자들은 거의 서툴다는 의식 없이 신적인 통치자와 인간 통치자, 신인 왕과 인간인 왕, 신인 왕자와 인간인 왕자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던 여기에서의 개념적 연계는 현재의 북미에서 그렇게 쉽게 확립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정치가들 즉 시장과 시 의회 의원과 국회의원을 통치자로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국가적인 정부의 수준에서 정치권력은 정부의 세 가지 부분에 의해 공유되어진다.(삼권분립) 진실로 거기에는 권력은 이런저런 개인이나 집단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연방 정부의 책임의 형태와 그 정부의 기관들을 한정하고 있는 헌법 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Ro 13장의 'the powers that be'라는 조문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복종해야 할 통치자가 아닌 미국의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영감된 행동 지침을 어기는 것이다. 더 심화해서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에서 오는 합법적인 요청에 동의하는 것을 거부한다면(예를 들면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사례) 그 대통령은 타당한 헌법적인 권위를 가진 Ro 13을 충분하게 지키지 못한 대통령이 된다. 더 깊이 말하면 헌법으로서 한정되는 정치권력은 공공정책과 행위에 관하여 비평과 검토의 권리가 있는 시민들에 의해 위임된 것이므로, 우리는 기독교인 시민이 정부의 공무원에 대한 비평 권리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성서적으로 고안된 조문인 'power that be'에 대한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규칙'의 복합적 체계이다. 어떤 체제 내의 공무원을 단순히 신의 왕국의 활동과 태도를 직접적으로 모델링한 군주 지도자의 활동으로서 단순하게 간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북미의 정치적 권위의 혼란과 분열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주제를 호소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확실히 윤리적 상황에 연계된다.

    정치체제의 구조적 복잡성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은 적어도 통치하기 위해 고안된 체제인 대규모 사회의 도덕적 복잡성에 의해 유발된 어려움에 필적한다. 정책 형성이 갖고 있는 고도의 가치는 다양한 이익 집단 사이의 분쟁을 조화시키고 판단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실제 체제의 목표에 대한 일치는 도덕적 갈등에 대해서는 유순해지고 목표에 대한 동의가 있을 시는 그 체제 내에서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신념에 있어 희생을 가져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실로 여기서 정확한 희생의 종류는 오늘날 특별히 정치 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당대의 지식 시장에서 유포되어 있는 일반적인 조직 이론들에 의해 뒷받침되어 진다. 예를 들면 리더쉽의 특성 이론은 과거에 일반적이었던 반면에, 그 이론은 개성과 인격의 주관적인 특성이라는 견지에서 주로 리더쉽에 대한 적절한 평가로 더 이상 간주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함에 의해 오늘날에는 조직적 리더쉽에 대한 과학적 고려가 매우 일반적이다. 리더의 주관적 성격에 관한 관심을 좀처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없었던 이러한 제기된 대안들은 일종의 체제 분석 상의 환경적 속박 또는 인식된 비용과 편익 또는 효과적인 행태같은 요소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는 또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다. James McGregor Burns는 그가 '거래적'이라고 명명한 리더쉽 패턴의 광범위한 보급에 대하여 걱정한다. 여기서 리더와 추종자의 상호작용의 목적은 '가치 있는 것의 교환'에 있는 것이다. 이런 거래적인 상호작용은 리더쉽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지만 번스는 주장하기를 거래에서는 그들은 투표를 한다거나 상품, 돈, 노동력 등 교환될 수 있는 재화만이 유일하게 가치있는 품목이라는 점에서 관계의 한 종류로 본다. 더 고차원적이고 영구적인 목적은 교환에 있어서 부분들을 함께 묶지 못한다. 이러한 것은 마키아벨리적 관계 속으로 쉽게 퇴락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적 관계의 목표는 사람들을 인도한다기보다 오히려 타인을 다루고 조작하는 것에 있다. 번스는 그가 변형된 리더쉽이라고 불리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변형된 리더쉽은 리더와 추종자들이 보다 높은 수준의 동기부여와 도덕성을 서로 제기하는 방식으로 한 사람 또는 더 많은 개인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발생한다. 독립적이나 연관된 기초에서 시작한 리더와 추종자의 목적들은 거래적 리더쉽의 경우처럼 연합된다. 권력의 기초는 상대편에 대한 압력같은 무게가 아니고 공통의 목표에 대한 상호적인 지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같은 리더쉽에 사용되어지는 다양한 명칭은 그들 중 몇몇은 조소할 만한 것이지만 예를 들어 상승, 등락, 고무적인, 올려진, 위로 들리는, 설교적인, 권면, 복음적인 등의 명칭이 있다. 상호관계는 물론 도덕주의자적이다. 그러나 변형된 리더쉽은 전적으로 리더와 추종자 사이에 인간 행동과 윤리적 열망의 수준을 상승시킨다는 점에서 도덕적이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리더와 추종자에게 변화된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적어도 중요하고 필수적인 리더쉽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리더쉽의 가치이며 리더의 개인적 특성이 중심적 구성요소가 된다. 변화된 리더는 인간 행동에 대한 규범적인 가능성이라는 비젼을 갖고 운영된다. 그리고 리더와 동료 상호간의 목표에 관한 의식적인 열망을 가지고 운영된다. 그같은 리더쉽 활용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의 확고한 신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보다 차원 높은 동기부여와 도덕적 향상을 위한 요청으로서 타인들과 기꺼이 연결되어져야 한다.

    오늘날 북미 정치에서 변형된 리더쉽을 실행하는 것은 가능한가? 비록 그는 몇몇의 정치 관청이 다른 정치 관청보다 변화하려는 노력을 더욱 많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번스는 북미 정치상 변형된 리더쉽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변형된 리더쉽에 관한 번스의 개념 정의는 우리가 동시대 정치 환경에서 예수를 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우리의 시도 속에서 탐구되어야 할 충실한 개념으로 보인다. 제국주의적, 군주적 골격을 전제로 한 기독교 정치 프로그램들은 현대 정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모든 것에 유효하다.

    오로지 예수만이 지구상의 통치자 모두를 지배할 수 있으며 진실하고 공정한 왕이다.(계 1:5) 그의 제자로서 우리는 단지 그의 사상과 정책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 접근은 단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으로서 일 뿐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군주가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이 고독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폭郴은 정치적 감각을 기를 수 있는 대화와 조심스런 실험같은 것을 통해서 차례로 가장 적절하게 되어진다.

    CHRISTOLOGY AND POLITICAL AUTHORITY

    변형된 리더쉽의 인식이 기독교인의 정치적 관련성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매력적인 이론이 되는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의 종(servanthood)에 대한 주제와 매우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종복의식을 고양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크리스챤들에 의해 유명해진 '종복적 리더쉽'(servant readership)에서 느슨하고 부정확한 방식을 극복하게 하는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변형된 리더쉽의 관점에서 예수의 정치성의 패턴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는 좀더 심화된 주장이 그러한 의도의 바로 그 사상에 대한 지지로서 제공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신학자들은 종의 신분이라는 개념이 예수의 정치적 권위의 패턴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중심적인 강조점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질문이 발생되었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1898년 Stone Lectures에서 Abraham Kuyper는 그가 제세례파적 관점에 대한 극히 거친 비평을 함으로써 그가 얻은 기독교인의 정치적 소명에 대한 타당한 칼빈주의적 견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카이퍼는 특별히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일반적으로 수용된 시민권 형태를 멀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따르는 윤리적인 모델을 제공했다고 하는 재세례파적 인식을 거부했다. 예수가 일련의 윤리적 요구에 기인한 새로운 장치를 가지고 공의의 정치를 위한 구약성서의 표준을 대신하기 위하여 왔다는 잘못된 가정을 멀리하라고 카이퍼는 주장한다. 카이퍼는 예수의 지상의 사역이 새로운 도덕적, 정치적 내용을 도입하였다고 하는 주장을 확실하게 거부하고 있다.

    과거 어떤 시기에는 하나님이 어떤 도덕적 질서 속에서 만물을 통치해 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가 창조의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심지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영원불변자가 아니었다면 어떤 동일하고 견고한 도덕적 세계 질서를 그가 유지하고, 유지할 것이고, 유지하려고 하며, 유지해 왔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악한 죄악이 이 세계질서를 뒤덮고 있는 먼지를 쓸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의 고유한 측면 속에서 다시 그것을 빛나게 하였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이 세계 질서의 운동법칙으로부터 예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확고하고 단호한 발걸음으로 이 세계 질서에서 거닐 수 있는 능력을 강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세계 질서 자체는 태초로부터 있어 왔던 모습 그대로 단지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불신자들로부터는 요구되어지는 것이 전혀 없는 듯) 신자들에게만이 아니고 모든 인류와 모든 인간관계 속에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존재해 왔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마치 우리가 이 생활을 규제해야 하고, 발견해야 하고, 창조해야 하는 것처럼 소위 도덕 생활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철학적인 이론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칼빈주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위엄의 효과 아래 위치시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질서와 불변의 계명에 우리를 복종시킨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에게 있어 모든 윤리적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인간의 가슴에 하나님이 새긴 근원적인 도덕법에 대한 신적인 믿음직한 요약으로서 시나이의 법에 근거하고 있다. (마치 도덕 세계 질서가 그 당시에 고정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시나이 법의 영예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이의 가슴에 그것의 변환을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주제에 대한 카이퍼의 요지를 적용은 해보면 명확하다. 카이퍼는 예수의 지상의 사역을 기독교인들의 의사 결정을 위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카이퍼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상호간의 패턴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가 이해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도덕-정치적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질서를 나타내는 구약성서에서 이미 유용하게 이용되어진 것으로 효과적으로 제공된 것들이다.

    카이퍼와 제세례파 사이에는 정치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는 특징들에 대한 예수의 사역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상이점이 많다. 카이퍼는 예수의 왕적 위엄을 많이 강조한다. 그의 계획에서 기독교인의 정치 관여에 대한 핵심적 필요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명시하는 것은 승천하셨고 승리한 왕으로서, 창조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신성한 권력에 대해 복종하며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재세례파는 예수의 지상에서의 수난에서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종복으로서 나타난 형태가 신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명시한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예수의 비권력(powerlessness)의 수용에 대하여 그것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승리한 왕으로서의 예수의 위치를 타당하게 이해할 수 없다. 요더의 주장에 의하면 그래서 예수가 보유하고 있는 사실성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다른 권력과 가치 구조들과 상충하는 것처럼 또 인간 예수를 섬겨 왔던 사람들이 마침내 그를 죽였던 식의 연관성을 가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예수의 역사성이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예수가 자신의 정치적 관련성 속에서 다양하게 이해했던 그의 사역에 대한 다른 이해 방식의 예를 찾기 위한 개혁-재세례파의 논쟁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성육신 하신 것이 예수의 정치적 표현의 극치라고 보고 있다. 지상의 예수의 사역은 예수가 수행한 기사와 이적에서 신비한 힘의 표출에 의해 가장 명확히 특성화되는데 이런 예수의 지상 사역을 모방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카리스마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물리치신 예수의 행동의 예가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된 체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구조를 만드는 중대한 과제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나의 의도는 이러한 차이점들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토론에 대한 결론으로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몇 가지 간결한 관찰 결과를 제공하려 한다.

    첫째로, 이러한 신학적인 불일치가 예수의 사역에 관한 정치적 관련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같은 복음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예수의 인성과 사역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우리의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관한 근본적인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 이러한 현재의 토론은 당연히 정치적 무대에 관한 장기적인 논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은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온 관례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에서의 일시적 전환이 아니다.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복종의 적절한 형태애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의 정치적 관련성에 대한 토론은 우리에게 기독론에서의 정치적 구현에 관한 전통적 기독론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내 생각으로는 카이퍼가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창조적 패턴의 배경에 대항해서 고려되어져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퍼의 과감한 단언이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제국주의자적인 어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그가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통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사역애 대한 복음의 목격자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알려질 필요는 없다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이다. 기독교인들이 완벽하게 훌륭한 용어로서 묘사되어져 있는 예수의 통치, 그리스도를 모방함에 힘쓰도록 격려를 받을 때 만일 그러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동료 시민을 지배하는 교리불변론자로서의 시도에 의해 특성화되는 정치를 증진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경이적인 것은 아니다.

    셋째로, 크리스챤 사회과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망으로, 신조화된 주장을 향해 난해한 도전이 되는 동시대 정치적 삶의 복잡성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 관한 에큐메니칼적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시한다. 카이퍼의 제국주의자적 논조는 20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의 재세례파의 신념은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 사이의 분명한 한계를 확실히 전제해 주지 못한다. 예수의 정치에 대한 비관련성에 대한 예전의 정의는 오늘날 메노파(Mennonites)와 아미쉬파(Amish)에게 명확한 지침과 안내를 제공하지 못한다. 아미쉬파의 농부가 군(country) 가뭄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은 정치적 관여가 아닌가? 또는 고속도로국의 자문가로서 참여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지방 공립학교 이사회 선거에 메노파의 선거 운동이 가능한가? 또는 극빈자를 위한 저비용주택사업을 연구하기 위한 정부의 전문가 집단(taskforce)의 일원으로 임명됨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치적 현실(context)을 변화시키는 것을 -루터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해방신학자와 신율주의자(theonomist)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신선한 관점으로 파악하는 제세례파와 칼빈주의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

    오래된 복음성가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문제는 우리가 '가정에서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나' 예수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제기되는 난해한 도전들은, 우리를 현대의 복잡한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이끌어 내는 기회를 제공한다.